나의 나무
보킴, 2024
시간의 흐름 속에 자연스레 드러나는 변화와 비영속성에 대해 말할 때, 나는 그 불완전함의 아름 다움을 온전히 받아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을 담는다. 부모님의 얼굴에 자리 잡은 흰머리와 주름살이 늘어갈 수록,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질 않을 이가 얼마나 될까? 내가 아플 때 걱정스러운 눈빛 으로 나를 바라보시던 그분들이, 이제는 부모가 마치 나의 자식인 마냥 내가 그들을 바라보며 걱정하는 시점에 이르렀고, 나의 모습은 시간의 흐름을 마냥 겸허히 받아드리는 모습은 아니다.
연작 <나의 나무> 가 이러한 마음을 대변한다. 어릴 적에는 그저 단순한 자연의 일부로만 여겼던 나무가, 이제는 부모님을 표현하는 상징이 되었다. 나무의 굳건한 뿌리, 우뚝 솟은 기둥, 무성하게 퍼진 잎사귀들은 나를 드넓게 보듬어주는 듯하다. 나무는 자신이 뿌리내린 자리에서 변함없 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가며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데 이 또한 부모님을 많이 닮아있다고 느꼈다.
부모님은 언제나 가족을 위해 나무의 기둥처럼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작품 '나이테'에서 나는 나무 기둥의 결을 사진으로 담고, 이미지 트랜스퍼링 기법과 한지에 모래와 흙을 중첩해 나무의 울퉁불퉁하고 거친 표면을 캔버스 위에 표현하였다. 캔버스에 흙을 덮어 세우는 과정에서 일부 흙은 견고하게 붙어 있지만, 일부는 시간이 지나며 떨어진다. “나무결은 나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자라는 동안 그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맥락성의 역사다. 인성이 인간관계의 역사이듯 나무의 성격을 드러내는 결도 나무가 맺어온 관계 성의 역사이다.”이처럼 나무의 성격을 나타내는 결과 표면 효과를 부모님의 나이듦과 연결 지어 표현함으로써, 한때는 듬직함과 강인함만 느껴지던 부모님의 모습이 이제는 그들의 주름살, 목에 자리 잡은 기미, 좀 더 야윈 어깨, 자라나는 흰 머리를 통해 느껴지는 애틋함과 안타까움이 느껴 진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걸어온 삶이 주름살로 남아있어도, 그 주름살 하나하나에는 그들의 삶과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이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떨어지고 쌓이는 흙은 세월 이 흘러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들을 표현한다. 이 모든 시간 덕분에, 나무처럼 깊이 뿌리내린 그 기둥이 우리 가족의 성장과 버팀목이 되주었고, '나이테'는 그렇게 부모님이 나를 품은 삶의 역 사를 드러내며, 그들을 향한 사랑을 작품에 담고 있다.
연작 <나의 나무> 속 작품, <93년의 9월, 한 쌍으로부터>는 부모님의 결혼 날짜를 기념하며 시 작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우뚝 서 있다. 무성하고 짙은 녹색의 잎이 가득한 이 나무들은 부모님을 상징한다. 나무 기둥에 붙어있는 나뭇가지를 보면, 마치 연리지처럼 두 그 루의 나무가 하나로 연결된 모습을 하고 있고, 두 나무가 하나의 울타리로 감싸져 있는 듯한 형 상을 하고 있다. 두 나무는 마치 손을 잡고 나를 포근히 안아주려 팔을 벌린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 형상을 보고 서세옥의 <사람들>을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서세옥은 "나는 사람들을 그릴 때 그들의 개별적인 특징보다 그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하나의 큰 흐름과 움직임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는 인간이란 존재가 개별적으로는 미미하지만, 모여서 하나의 큰 힘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의 존재와 의미, 그리고 공동체의 중요성을 작품에 담았으며, 나 또한 이 작품을 통해 부모님의 만남과 가정의 형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두 사람이 만나 자식을 낳고 하나의 가정을 이루며, 내가 이 가족의 일원이 되어 그들을 표현하는 나의 작은 세상을 나무에 비유해 담아낸 것이다.
작품 양쪽에 존재하는 가지의 추상적인 형태는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듯하기도 하고, 무성한 나뭇잎 사이에서 자유롭게 자라나 뒤엉킨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무의 가지는 "어떤 상황에서 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뿌리째 흔들리지만 꿋꿋하 게 견뎌내며 가지와 줄기를 흔들어댄다. 눈보라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나무는 얼지 않고, 눈이 나 뭇가지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도 가지는 부러질지언정 줄기는 부러지지 않는다. 나무는 열악한 환 경에서도 자신의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간다." 이 모습은 수많은 가지가 흔들려도 굳건히 자리 를 지키는 두 그루의 나무를 상징한다.
세 점의 캔버스가 이어진 모습은 마치 두 사람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만세를 외치는 것 같 기도 하며, 두 팔을 크게 벌려 나를 안아주는 모습처럼 보인다. 나는 관객들이 이러한 형상을 자 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두었다. 작업 방식은 연작 <아로새기다>와 동일하게, 한지 와 모래, 그리고 물감을 한 겹 한 겹 쌓고 기다리며 내 감정과 기억을 담아냈다. 한지를 겹겹이 쌓으면서 기억과 감정이 진해지기도, 흐려지기도, 변하기도, 선명해지기도 한다. 부모님과 함께 쌓아온 시간과 기억은 모두 선명하지는 않지만,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사랑과 믿음이 담긴 여러 감정은 잔잔히 남아 있다.
<나의 나무>는 부모님의 존재와 그들이 나에게 주는 사랑을 표현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도 아름답고 소중한 나무의 모습은 부모님의 모습에 비유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가족의 견고함을 상징하며, 그들을 향한 애틋함과 사랑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