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풍경놀이 | 라흰갤러리 | 2023.03.23 - 2023.04.29

보킴, 정재나

잔류의 시간들 – 보킴

보킴의 작업은 대기를 물들이면서도 언제든 광채를 상실할 수 있는 바깥의 세계를 관조하며 어렴풋한 의식에 젖어든다. 햇빛이 구름을 태우며 스러지다가도 어느덧 여명이 되어 솟아나기까지의 이 정적만이 흐르는 시간을 응시하고 공기를 거듭 감지하며, 정경으로부터 얻은 영감을 작품에 물들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모든 현상의 장막 뒤에는 생멸이 도사리고 있다’는 섭리를 구도하듯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크게 두 갈래의 방향으로 발전한다. 가령 2016년도의 ‘Impermanence’ 작업으로 시작한 일련의 연작들은 물거품처럼 늘 변하는 제행무상 (諸行無常)의 비 (非) 영속성만이 바로 만물의 본성임을 꿰뚫어 본다. 더불어 보킴은 또 다른 시리즈인 ‘아로새기다 (When light is put away)’ 작업을 통해 이와 같은 우주의 이치 앞에서 그의 마음으로 스며드는 감정과 서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선보이는 작업들은 생명이 내어주거나 가로채는 창밖의 풍경 혹은 하루의 궤적에 따른 변화들을 작가의 감정의 그물에 담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는 후자에 가깝다.

예컨대 본 전시에 출품된 보킴의 <창밖에 어둠이 내리면>과 <너무 긴 어느 겨울날에>는 각각 이슥한 밤에 별이 하나씩 지워지며 빛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 고요를 포착하거나, 작업실 바깥의 경치가 실내를 물들이던 때의 향수를 담고 있다. 때로는 체험한 것을 펜으로 포착해낸 일기의 구절이나, 생동하는 박자로 작가와 함께 긴 밤을 지새우던 선율이 일종의 영감이 되어 작업에 둥지를 틀기도 한다. 또한 전시장 1층의 창가에 설치된 미디어 작품 <차경>은 감상자가 소유하기를 바라는 이상적인 경관을 라이트 패널에 표현하면서도, 블라인드를 통해 이를 교묘하게 차단하고 착각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이상과 실제 사이의 극단을 부유하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담고자 하는 정경이 마치 한옥에 오랜 시간 머물며 창호지를 통과해 들여다보는 것인 양, 가변성과 잠재성이 실현되는 풍경이 되어 관객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이 둔한 탓에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변화를 쉽게 파악하지 못하지만, 긴 시간 이를 관조하게 되면 꽃과 나뭇잎, 별의 색과 모양이 변하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보킴은 바로 이처럼 그 자신이 생성과 상실을 들여다보았던 혼자만의 ‘잔류의 시간’을 작품에 담아 감상자의 관능을 흔들고 있는 셈이다.

한편 위와 같은 점에서 작가의 출품작들은 그가 꾸준히 천착해온 ‘비영속성’의 주제와도 맥을 같이 한다. 특히 연기 (緣起)적으로 오고 가는 풍경 작용에 자신을 편입하고자 했던 작가의 심리는 한지와 모래가 주축을 이루는 재료로부터 부각되고 있다. 한옥의 창에서 착상을 얻었다는 그는 얇은 순지를 이용해 프레임 너머의 풍경과 빛, 그것의 기억이 아스라이 멀어지는 감정을 회화로 구현해낸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한지를 겹겹이 오려 붙이고 물감을 얹기를 반복한 후에, 경계선 위로 발린 가루풀을 따라 모래를 뿌린다는 점이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오려 붙인 한지에 주름이나 얼룩이 생기는 것과 함께, 모래 역시 순리를 따르듯이 뜯겨나가게 된다. 요컨대 보킴이 사용하는 이 천연에 가까운 재료들은 작가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관상 (觀想)의 감정을 잘 드러낼 뿐만 아니라, 매체 또한 변화를 수반하는 잔류의 시간에 온전히 내맡겨짐으로써 작가가 풍경의 근저로부터 체득한 다층적 사유를 표출하는 것이다. 그의 사유와 수행이란 자연 현상이 만드는 변화와 생성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을 이 무상함과 분리되지 않는 통일체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좁은 길의 암시다. 그러나 아침의 입김이 어스름이 되어 기우는 풍경의 흐름 앞에서는 인식의 의지를 굴복시켜야만 비로소 그것의 해방된 힘이 솟아나는 법이다. 보킴의 작업은 개체를 분별하거나 불변의 독자성으로 풍경을 밀어 넣지 않는 이러한 지혜를 발휘하며, 자연 현상의 끊임없는 차이와 생성에 깨어 있기를 자신과 관객에게 촉구하고 있다.

글 | 조은영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사진 | 양이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