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 눈을 떴다. 밤새 꾼 꿈에서 흘렸던 눈물이 아직도 멈추지 않은 채였다. 몽롱한 상태로,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나는, 이 모든 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꿈속의 연속인지를 분별하려 애썼다. 생각을 정리하려 애쓰는 그 짧은 30초 동안, 어느덧 눈물은 조용히 멈추었다. 눈물과 함께 깨어난 그 순간, 꿈속의 장면들이 내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꿈의 내용은 점점 희미해졌고,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남겨진 것은 단지 꿈에서 느꼈던 감정의 잔상뿐, 마치 바람에 스친 향기처럼, 그 슬픔이 무엇에 대한 것이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먹먹한 여운만 내 마음 한 구석에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이른아침, 그렇게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에서 내 감정의 실체를 찾아 헤매며, 작은 기억의 조각 하나에 내가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그렇지만 때로는 가장 강렬한 감정조차도 흐릿한 기억 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사랑은 어떤 말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을 지니고 있고, 대표 연작인 <아로새기다, When Light is Put Away>와 <나의 나무>에는 언제나 이 애틋함이 녹아있다. 나는 드러내고 싶으면서도 홀로 간직하고 싶은 나의 감정과 이야기를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사람, 장소, 관계, 감정과 같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자연의 이미지에 빗대어 표현하는데, 이를 더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해자연 친화적인 재료를 사용한다.
<아로새기다, When Light is Put Away>
아로새기다: 1. 무늬나 글자 따위를 또렷하고 정교하게 파서 새기다. 2. 마음속에 또렷이 기억하여 두다’. 의 사전적 의미와 같이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밤이 찾아왔을때 (When light is put away) 사진과 글을 통해 기록함으로서 마음속에 또렷이 새기는 하나의 반복적 일상이 되었다. 일기를 쓰고 눈에 담은 자연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의미있는 순간들을 기억하며 그때의 감정을 작품에 담아내는데, 작품을 만드는것은 나의 감정과 생각을 보여주기 위함이지만 때론 모든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추상적인 작품을 만든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마음, 전할 수 없는 편지를 쓰듯이 온 마음을 쏟아내며 순간을 기록한다. 그 순간은 색채와 형상으로 표현되며, 일기의 한 구절이, 노래 가사가, 때로는 시의 한 줄이 제목으로 내 마음을 대변한다. 제목을 붙이는 일은 내 마음을 드러내는 과정과도 같은데, 내 마음이 보여졌으면 하는 바람과 동시에 그것을 너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고민한다. 몇 번이고 제목을 쓰고 지우고, 다시 고치는 것을 반복한다. 이러한 애매모호함이 나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이 모호함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의 해석을 찾아 가도록 유도한다.
일기를 쓰며 찍은 하늘의 이미지에 빗대어 쌓여진 감정과 기억을 표현한다. 알다가도 모를 이 감정은 봄바람이 부는 듯 가벼우면서도,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파도처럼 강렬하다. 이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한지, 모래, 물감을 이용하여 시간의 간격을 두고 한 겹씩 쌓아 올린다. 반복된 중첩은 마치 세월이 쌓여가는 듯하다. 종이를 붙이고, 물감을 바르고 말릴 때마다 때로는 감정이 변화하고, 때로는 하나에 몰입되기도 하며 선명해지거나 흐려지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의 감정이 교차하며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시간의 변화를 시각화하기 위해 한지, 모래, 물감, 나무껍질, 꽃잎 등의 자연 친화적인 재료를 사용한다. 이러한 재료가 중첩되고, 찢기고, 주름이 생기는 순간들은 아름다움으로 여겨지고, 이는 인생에서 마주하는 예기치 못한 가치, 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로도 표현된다. 언덕길을 걸으며 본 하늘의 모습, 작업실 창문 너머 들여다본 우거진 나무와 떨어져 가는 잎사귀들, 지나간 계절이 다시 돌아왔을 때 느끼는 왠지 모를 울컥함과 설렘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깊어지기도 하고 연해지기도 하지만, 그 안의 애틋함은 언제나 잔잔하게 남아있다.
설렘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사랑은 때론 눈부신 순간 속에 가려진다. 이에 비해 "애틋함"은 내가 행복할 때, 기쁠 때, 슬플 때, 화가 날 때, 언제나 공존한다. 이것은 마치 오랜 세월 쌓인 흙이 깊고 단단한 땅이 된 것처럼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함께 보내온 시간이 거칠고 울퉁불퉁하지만, 더욱 견고해지는 나무와 같고, 이는 행복한 순간뿐만 아니라 상처와 슬픔, 어둠과 눅눅함까지 모두 지니고 있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며 우리를 무심하게 변화시키고 이를 막을 수 없을테지만 이 작은 감정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영원히 간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