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터전은 자연과 인간의 가공물이 더해진 앙상블이다. 여기서 터전이란 단순하게는 우리가 당연히 여겨온 주변의 환경을 일컫고,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자연, 인간, 물질, 그리고 이것들이 각각 상호 의존하며 만들어 내는 영역을 뜻한다. 새들에게는 하늘이 물고기에게는 바다가 그저 존재의 배경이듯이, 인간에게도 주어진 환경은 어쩌면 인식되기 어려운 자연스러운 배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엇인가를 세상에 내어놓는 창조 행위를 통해 자신의 서식지를 가꾸고 주어진 환경을 개척해 왔다.

《Entwined: 생명의 연립》 전시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생성되고 소멸한 모든 생명체와 인공물이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로 함께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전시 제목에서 “Entwined”는 긴 시간의 역사를 함께하며 복잡하게 얽혀있는 생명체들의 존재 양상을 뜻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명의 연립”은 자의든 타의든 곳곳에 창조된 다양한 생명체가 독립된 하나의 개체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적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전시에 참여하는 박예림, 보킴, 장한나는 인간을 포함한 창조 세계의 다양한 존재들을 매개로, 어떤 생명의 원형과 여기서 파생될 수 있는 또 다른 생명의 양식을 상상하고 감각하는 일에 집중한다.

이는 모호하고 근본적인 관점에서 우리 삶 속에 다양한 존재들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성을 바라보는 시도로서 볼 수 있는데, 그 시도의 프롤로그 격으로서 먼저 박예림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박예림은 신화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과 다른 생물종 사이의 관계성을 관찰한다. 박예림의 작업은 곳곳의 다양한 원시림으로 필드 트립을 다니는데서 출발한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의 초현실적인 공간을 탐사한 후, 박예림은 원시림과 같은 공간에 만약 누군가가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를 상상한다. 그 과정에서 박예림은 현미경으로 동식물의 파편을 관찰하기도, 과학책이나 생물책을 참고하기도, 신화나 만화와 같은 문학적 요소를 참고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작은 세상에 있던 모든 생물종이 사라지고 그것들의 흔적만 남은 상황이 작품의 시점으로 설정되어 있다. 작품에는 동물 뼈와 껍질과 같은 생물종의 흔적이 포착되고, 그 흔적들 사이로 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은 생물 중에서 최후에 살아남은 인류를 상징한다. 인간을 상징하는 나체의 인물은 어떤 말도 표정도 소리도 전달하지 않지만 평온하고 화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그 이유는 작품에서 생물종의 흔적과 인간이 일으키는 신체적인 접촉 때문일 것이다.

박예림의 작품에서 마지막의 순간을 함께 하고 있는 인간은 무중력의 상태로 거대한 뼈를 벤치 삼아 앉아 있으며, 또 다른 작품에서는 남아있는 생물종의 파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입맞춤을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지하에 전시된 작품에서, 최후의 인류는 거대한 포털(portal)처럼 묘사된 눈동자 앞에서 기도하듯 눈을 감고 눈동자를 어루만지고 있다. 이러한 장면은 같은 시공간 속에서 인간과 다른 생물종이 서로를 의지하고, 교감하며 축적해 온 관계성을 상상하도록 한다.

이렇게 박예림의 작품은 생사의 교차 속에서 인간과 다른 생물 종들이 결국에는 서로 조화되고 스며들 줄 아는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신화적 상상이 현실에서도 가능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시간성으로 접근하여 탐구하는 보킴의 작업을 이어서 살펴보겠다. 보킴은 오랫동안 자연을 매개로 가변적인 생명의 속성을 탐구해 왔다. 그 연장선에서,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작업은 자연과 인간의 시차 속에서 작동하는 인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내 눈에 부모님은 나무처럼 곧고, 우직하며, 강인한 모습이었는데, 어느새 얼굴의 주름이 눈에 띈다.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로 남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는 자연의 순환 중 일부일 뿐인데. 나의 부모님은, 나의 나무는 언제나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울창한 푸른 숲의 나무로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나 보다.” 이 글은 보킴이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나의 나무> 연작을 작업하며 남긴 노트이다. 이 연작의 작품은 인간의 유한한 생명력에 초점을 맞춰, 부모의 노화 과정을 살피는데서 출발한 작품인데, 보킴의 노트에 기록된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는 비단 보킴뿐만 아니라 우리의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간에 따라 인간의 나이들어 감이 자연의 입장에서는 그저 담담한 창조 질서이지만,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마냥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킴의 작업은 자식과 부모가 맺어온 관계성의 역사를 다루며, 그 너머에 더욱 깊고 길게 존재해 온 우주의 시간성을 고찰하도록 이끈다. 그 시도의 일환으로, <나이테> 연작은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부모의 주름진 얼굴을 긴 시간을 지나 보낸 나무결로 표현한 작업이고, <93년 9월, 한 쌍으로부터>는 연리지처럼 두 그루의  나무가 하나로 연결된 모습을 통해, 생명 공동체로 엮여있는 부모와 자식의 존재를 비유한다. 그렇게 보킴은 자연의 형상을 통해 생각의 통찰을 얻고, 감정을 관찰하며, 논리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웠던 생의 원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본 박예림과 보킴의 작업은, 상상에서든 현실에서든 각각의 생명체들이 지닌 생의 운명과 시간은 각기 다르고 상대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연결되고 귀속되어 있음을 공통적으로 알려준다. 이러한 지점은 단순히 살아있는 생존이 아니라, 관계성을 바탕으로 온전히 조화하는 생명의 본질을 보여준다. 장한나의 작업은 이러한 생명체들의 속성과 관계성을 실제로 살아 있는 생명체의 가시적인 현상을 통해 생생히 증명한다.

장한나는 무언가를 만드는 창작은 배제하고 수집과 리써치에 기반한 프로젝트 형식의 작업을 한다. 장한나는 2017년 울산 앞바다에서 신비로운 물체를 발견한다. 그가 발견한 물체는 바위의 형상을 한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조각 덩어리. 이후 장한나는 제주, 인천, 양양, 대부도, 부산 등의 바다와 한강을 돌며 인간이 사용하고 버린 스티로폼을 1,000개 이상 수집하였고, 그들에게 ‘뉴 락' 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버려지는 존재에게 불릴 이름을 지어줄 일이 있을까. 

뉴 락의 형태와 색은 그 모태가 되는 플라스틱의 색과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뉴 락은 인간이 최초로 만들었던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의 형태가 아니다. 자연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실제 바위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뉴 락은 외형적인 측면에서만 자연을 닮은 것이 아니라 그 본성 또한 자연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따개비의 서식지가 된 뉴 락, 식물이 뿌리를 내린 뉴 락, 개미의 집이 된 뉴 락이 그 예다.

이처럼 과거의 뉴 락은 인간을 위한 인공물이었지만 이제는 자연을 위한 자연물로 존재한다. 장한나는 이렇게 새로운 생명력과 기능성을 부여받은 물체를 진화된 생명체로 보고 그들에게 뉴 락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뉴 락의 이러한 역설적인 생명력은 생명체들이 각자의 환경에 따라 충돌하다가도 서로에게 흡수되어 살아가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며, 자연이 얼마나 복잡 미묘하게 창조되고 운행되는지에 대한 감각을 깨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박예림, 보킴, 장한나의 작업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관계성을 미시적이면서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끔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가까이는 스마트폰을 통해, 때로는 창공의 별빛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세계와의 관계를 심화하고 확장한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자신의 바깥 세계는, 과거-현재-미래를 교차하는 풍성하고 통합적인 넓이를 지닌다. 이번 전시는 이처럼 우리 인간을 둘러싼 무한한 환경을 새롭게 성찰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존재와 더불어 우리와 관계 맺는 다양한 존재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지평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다채로운 접속과 연합, 창발을 관람객이 새롭게 인식하기를 유도한다.

글│임소희 (BHAK)